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문단 편집) ==== 제국의 분열과 전란 ==== [[호부견자|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후계자들이 어느 쪽이나 싹수없기로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스틸리코는 사실상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활동하게 된다. 다만 그의 지배력은 제국 서부에 국한되어 있었고, 아르카디우스가 다스리던 제국 동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총애하던 갈리아 출신의 재상 루피누스[* 젊었을 적에는 상당한 미남이었고, 법률가인 동시에 관료로서 출중한 수완을 발휘했다. 다만 물욕과 권력욕이 좀 지나쳐서 테오도시우스 1세 생전에도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의 영향권 안에 있었으며, 루피누스를 싫어하던 동로마 궁정의 관료들과 아르카디우스의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도 스틸리코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에우독시아가 스틸리코에게 패사했던 아르보가스트의 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395년 말부터 고트족이 준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때 동방 제국군은 [[훈족]]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움직임을 경계하여 대부분 동방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동방 제국의 북부 국경선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게르만족과 맺은 조약에 그 운명을 걸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뒤, 고트족은 이 조약을 무시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이때 고트족의 지도자로 추대된 사람이 고트족의 명문인 발티 가문의 출신의 [[알라리크]]였다. [[알라리크]]의 봉기로 순식간에 하드리아노폴리스까지 털려버리자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긴급히 스틸리코에게 군대를 되돌려보낼 것을 명령했고, 이에 스틸리코는 휘하에 있던 동방 제국군에 제국 서부의 군대 일부를 합쳐 출격, 알라리크의 고트족을 내쫓았다. 하지만 루피누스의 흉계로 인해 스틸리코는 동방 제국군의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동방군을 되돌려보내게 된다.[* 이후 루피누스는 스틸리코가 돌려보낸 동방군에 의해 참살당한다. 스틸리코의 지령이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이후 정세를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당시 스틸리코가 서로마 제국 섭정이기는 했지만 이전에는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신하였으므로 그의 기반은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다. 자신의 기반을 모두 무너뜨릴 수 있는 선택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동로마에서는 루피누스 암살의 배후를 스틸리코로 단정하고 동로마에 있는 스틸리코의 재산을 몰수한다.] 이후 알라리크와 다시 한 번 맞선 스틸리코는 또다시 그를 격파하지만[* 이 전투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견이 존재하지만 알라리크가 털린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동방 제국과의 불화로 결정적인 공세를 취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가 알라리크를 놓아보낸 직후, 알라리크는 다시 동방 제국에 군사행동을 감행, 아르카디우스 황제에 의해 [[일리리쿰]] 전역을 통치하는 군사령관이 되면서 스틸리코는 자신이 사실상 통치하는 이탈리아 곁에 강대한 숙적을 두고 사는 신세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발렌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한번 반란을 일으켰던 바 있는 [[북아프리카]]에서 다시 반란이 발생, 서방 제국이 일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북아프리카는 로마 제국 시대에 [[빵셔틀|밀의 주산지로]], 사실상 [[이탈리아 반도]]의 식량자원 공급을 책임졌다.] 다행히 반란군의 수괴 [[길도]]의 동생이자 형에게 두 아들을 잃은 마스케젤을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반란군을 분열시킨 스틸리코의 적절한 대처로 반란은 조기에 진압되었지만 미봉책에 불과했고, 결국 스틸리코는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으로 제국의 사방을 지켜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스틸리코는 각지 속주에 파견되어 있던 군대를 소환했는데, 이때의 일을 배경으로 집필된 소설로 '[[눈 속의 독수리]]'가 있다. --다만 여기서 스틸리코는 본의 아니게 먹튀로...--] 서기 400년, 아프리카 반란을 조기에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집정관]]이 되었지만 허울뿐인 명예였다. 401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여기에 [[반달족]], [[알란]]족 등의 소규모 부족들이 합류하여, 이탈리아 북부에 해당하는 라이티아 속주로의 대규모 침공이 단행되었다. 스틸리코는 이에 직접 출격, 도나우 강을 건너서까지 동고트족을 추격하여 격파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양동작전|이것은 알라리크가]] 이탈리아를 [[성동격서|침공하기 위해 던진 낚시였다.]]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에 의한 침공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 그 무렵 호노리우스가 머무르고 있었던 밀라노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스틸리코는 이러한 급보를 접하고 바로 군을 퇴각시켜, 총세 3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밀라노로 급행하여 [[몽진|피난길에 오르려던]] 호노리우스 황제를 구출하고 402년 4월 6일, '''폴렌티아 전투'''에서 알라리크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의 대전과를 거두었지만, 알라리크는 휘하의 정예병 대부분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완승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어 403년, '''[[베로나]] 전투'''에서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군대를 포위하는데 성공했는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의 서술에 의하면 이때 알라리크는 [[하후영#s-3|자신이 탄 말의 속도에 자신의 명줄을 걸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숨통을 끊으려 하지 않았고, 휴전조약을 체결한 뒤 알라리크를 [[일리리쿰]]으로 돌려보냈다.[* ~~협박으로 따낸 거긴 하지만 어쨌든~~ 동방 제국의 장군 신분이던 알라리크를 처단할 경우, [[동로마 제국|동방 제국]]과의 내전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알라리크를 이용하여 모종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사방의 적들에 포위된 상태나 다름이 없었던 서로마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쓸만한 동맹을 구하려했다는 의견도 있다. 숙적인 알라리크가 왜 쓸만한 동맹이냐면, [[콩라인|실력은 있지만 스틸리코한테는 4번이나 발려서]](...).] 이때가 사실상 스틸리코의 [[리즈 시절|절정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